나의 이야기

영화 <사일런스>에 대한 단상

21세기룸펜 2023. 9. 21. 20:01

세계적인 명감독 마틴 스콜세이지의 영화 사일런스는 일본 가톨릭 박해 시기에 있었던 예수회 소속 사제의 배교에 대한 영화다.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소설이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영화 대부분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일본의 봉건 지배층이 가톨릭을 처음 접하였을 때, 학식이 풍부하고 해외 경험이 많은 선교사를 통하여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라고 여기고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하였으나 일본 내부의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이에 대한 원인의 일부로 가톨릭을 지목하기에 이르렀고 가톨릭이 지배층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는 판단아래 엄청남 박해를 가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봉건 영주(영화에서 이노우에)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후미에(예수 또는 성모 마리아를 새긴 목판이나 금속판)를 바닥에 놓고 밟고 지나가도록 하여 밟고 지나간 이를 살려주고 그렇지 못하는 이들은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여 배교를 강요한다. 
그러나 신자들을 배교시키는 방법이 그리 효과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사제에게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게 하고 사제가 이를 행하지 않으면 사제를 순교토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신도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방법으로 바꾼다. 
조선에서도 가톨릭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있었지만 일본의 영주와 같은 영리한(?) 박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천주교인을 찾아 색출하고 그들을 심문하여 다른 신자를 색출해 내고 배교하지 않으면 순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 일본의 영주는 어떻게 그런 효과적인 박해 수단을 찾아내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노우에가 이전에 가톨릭 신자였었고 이후에 가톨릭이 자신의 봉건지배에 결코 유리하지 않음을 알고 스스로 배교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잘 알기 때문에 더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자신에게 닥치는 어떠한 잔인한 고문이나 죽음은 어떻게든 견디어 낼 수 있겠지만,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신자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스스로 가장 무기력해질 뿐만 아니라 '신조차도 무능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그런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죽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어가는 신자들을 보며 사제는 하느님께 처절한 기도를 드리지만 신은 아무런 응답이 없이 침묵(사일런스)할 뿐이다. 
신자들을 살리려면 자신이 배교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뿐이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사제는 배교를 하여 불교 신자가 되어 결혼도 하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물품에서 성물을 가려내거나 숨은 신자를 찾아내는 일에 협력하게 되며 끝내 불교신자로 죽음을 맞이한다. 

마틴 스콜세지가 사일런스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당신이라면 같은 상황에서 배교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는가? 
오직 신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에게 신은 어찌 끝없이 침묵을 하는가? 
침묵하는 신은 없는 편이 더 좋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근본적이긴 하지만 뻔한 클리셰인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신을 부정하거나, 무능하게 보는 영화가 어디 한두 편이었는가?) 
그런데 오늘은 어쩌면 이노우에의 배신-요즘 한국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에 대한 이야기 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침묵한다고 해서 유약한 것이 아니다. 
침묵한다고 해서 꺾인 것이 아니다. 
침묵한다고 해서 저항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한다고 해서 투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있는 나다.(EGO SUM QUI SUM) 

구원은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이다. 
해방은 신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산물이어야 한다.